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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꽃 무궁화의 유래

우리 나라의 나라꽃은 무궁화로서 오랜 역사 속에 우리 민족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어 오는 동안 자연스럽게 나라꽃이 된 대표적인 예다. 우리 나라의 나라꽃인 무궁화는 법률이나 제도로 정한 바는 없으나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배달 겨레의 꽃으로 자리잡아 왔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근역(槿域), 근화향(槿花鄕)이라 불렀는데 이는 '무궁화의 나라'라는 뜻이다. 또 지금까지 전하는 동양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도 '군자국 유 훈화초 조생모사(君子國 有 薰華草 朝生模死)'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의 '훈화초'는 바로 무궁화를 일컫는 것으로 '군자국(우리나라)에는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는 뜻이다. 이밖에도 이수광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고금주(古今注)에서 인용한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대목이 있고, 동경잡기(東京雜記), 해동역사(海東繹史) 등 많은 문헌에서 우리 나라를 무궁화의 나라로 일컬어 왔다. 특히 고려 예종 때는 고려를 스스로 '근화향(槿花鄕)'이라 칭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군자의 나라는 사람들의 민족성이 군자답고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고 예찬함으로써 우리 나라를 무궁화로 상징하여 '무궁화 피는 화려강산'으로 인식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역사도 국어도 국기도 없고 애국가를 부를 수조차도 없었던 일제하에서 그 어느 나라의 국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우리의 무궁화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겨레의 꽃'으로 온 겨레의 가슴에 연면히 자리하여 왔다. 21세기를 시작하는 1월의 문화인물 한서 남궁억은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세우고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하여 열강의 침략을 폭로하던 개화파 거두였다. 그가 말년에 절망 속에서 잡은 계몽과 의식화의 무기는 어떤 단체도 아니요 펜도 아니었다. 한 그루 무궁화 나무였다.

우리의 조국이 광복된 후에는 입법, 사법, 행정 3부(三府)의 표상으로 무궁화가 사용되었고, 국기의 봉도 무궁화 꽃 형태로 제정함으로써 명실공히 무궁화는 '나라꽃 겨레꽃'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나라꽃 무궁화의 내력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무궁화(無窮花)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옛 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은 무궁화를 고조선(古朝鮮) 이전부터 하늘 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겼고, 신라(新羅)는 스스로를 '근화향'(槿花鄕 : 무궁화 나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중국(中國)에서도 우리나라를 오래 전부터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라고 칭송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무궁화는 조선말 개화기를 거치면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노래말이 애국가에 삽입된 이후 더욱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와 같은 무궁화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한결 같은 사랑은 일제(日帝) 강점기에도 계속 되었고, 광복 후에 무궁화를 자연스럽게 나라꽃 國花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백여 품종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는데, 꽃 색깔에 따 라 단심계, 배달계, 아사달계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정부는 이들 가운데서 꽃잎 중앙에 붉은 꽃심이 있는 단심계(丹心系) 홑꽃을 보급 품종으로 지정하였다.

무궁화는 7월 초순에서 10월 하순까지 매일 꽃을 피워 보통 한 그 루에 2천∼3천여 송이가 피며, 옮겨 심거나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민족과 함께 영광과 수난을 같이해 온 나라꽃 무궁화를 더욱 사랑하고 잘 가꾸어 그 고귀한 정신을 길이 선양해야 할 것이다. 

지나다 무궁화 유래가 있어 옮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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